Elvis Presley


엘비스 아론 프레슬리(Elvis Aaron Presley,[a] 1935년 1월 8일 ~ 1977년 8월 16일)는 미국의 가수 겸 배우다. 20세기 가장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하나로 평가되는 그는, 이따금 "로큰롤의 제왕" 또는 "왕"으로 지칭된다. 미네소타 주 투펄로 출신의 프레슬리는 13살에 가족과 테네시 주 멤피스로 이사했다. 1954년 그곳에서 프로듀서 샘 필립스와 선 레코드에서 곡을 녹음하여 음악 경력을 시작했다. 기타 주자 스코티 무어와 베이스 주자 빌 블랙과 프레슬리는 로커빌리, 업템포, 컨트리 음악과 리듬 앤 블루스의 백비트 주도 융합의 초기 유행을 선도했다. 매니저 톰 파커 대령의 주선을 통해 프레슬리는 RCA 빅터와 계약을 맺는다. 파커는 향후 20년간 그의 매니저로 활동했다. 1956년 1월 발매된 프레슬리의 첫 RCA 싱글 〈Heartbreak Hotel〉는, 미국에서 1위를 달성한다. 일련의 성공적 전국 방송 출연 및 차트 정상 레코드를 통해, 그는 로큰롤의 핵심 인물로 부상했다. 그의 열정적인 노래 재해석과 성적 도발의 공연 방식은, 흑인의 영향을 받은 아주 강렬한 배합과 섞여 그를 몹시 유명하게 했으나, 민권 운동의 여명기와 동시기에 있었으므로 동시에 논쟁적으로 만들었다. 1956년 11월, 자신의 첫 출연 영화 《러브 미 텐더》를 제작했다. 1958년, 징병되어 군 복무를 한다. 그로부터 2년 뒤 음반 경력을 재개하여 프레슬리는 자기의 가장 훌륭한 작품을 몇몇 제작했고, 이후 1960년대 전반을 할리우드 영화 및 그 사운드트랙 음반 제작에 할애했다. 이 작품들 대다수는 아주 가혹한 평가를 얻었다. 7년간의 라이브 공연 중단을 뒤로하고, 1968년 갈채 받은 텔레비전 컴백 스페셜 《엘비스》를 통해 무대에 복귀했다. 이는 곧 라스베이거스 콘서트 전속 가수 겸 고소득 투어로 확장되었다. 1973년, 프레슬리는 최초의 전 세계 위성 방송 콘서트 《Aloha from Hawaii》에 출연했다. 1977년 8월 16일, 자기 사유지 그레이스랜드에서 심장 마비를 일으켜 사망했다. 수년간의 처방된 약물 남용이 원인이었다. 프레슬리는 20세기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 있던 음악가 중 한 명이다. 팝, 블루스, 가스펠에 이르는 다양한 장르에서 상업적 성공작을 배출한 그는, 전 세계 음반 판매고가 6억 장으로 추정되어 가장 많은 음반을 판매한 아티스트 가운데 한 명으로 자리매김했다.[5] 세 번 그래미상에 우승했고[6] 36세 나이에 그래미 평생공로상을 받았으며 각종 음악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